쓸 것이 없을 때
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무엇부터 써야할까, 막연하여 영감을 기다리던 중 접한 글.
정열, 사랑, 미움, 두려움, 희망. 좋은 글쓰기는 이런 원천들에서 솟아 나온다고 한다.
물론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나의 삶에 이러한 원천들이 그닥 가득하진 않은 편이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 나는 쓸만한 글이 없어, 하기보단 쓸만한 글이 없다는 상황에 대해 쓰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떠오른 궁금증.
이런 ‘오히려 좋아’같은 식의 얼렁뚱땅 주제 정하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말주변이 없는 편이다.
때문에 사람을 처음 만나 대화로 공기를 채워내야만 할 때 어떤 주제를 건넬지 고민하곤 했었다.
그 결과,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 대화 주제를 잡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라고 멋쩍은 솔직함을 전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대는 그런 나를 배려하게 되는 것 뿐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불편해해서 조용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 좋은 대화 주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캐릭터가 생길 때 더 궁금해지는 법.
아무 캐릭터도 없던 상황에서, 말보단 글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무궁한 대화의 선택지들이 열리는 것이다.
일단 첫 흐름에 올라타면, 대화는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어떤 대화를 건넬 지 모를 때 그 관계를 포기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듯이,
무엇을 쓸 지 모를 때 펜을 잡는 일을 멈춰버리면 그렇게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러한 고민 자체를 주제로 삼아서라도 무엇이든 쓰다보면 어느새 글을 술술 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지금 이 글이 그러하듯이.